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역사의 종말

후쿠야마는 그의 저서 역사의 종말 에서 자유민주주의 자유기업의 사회형태를 모두가 받아들이는 것이야 말로 역사의 종말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역사는 ‘방향과 종말이 있는 과정’이라는 헤겔의 생각을 부활시키며 등장하였다. 후쿠야마에 따르면 역사에 종말이 있다는 것은 역사가 끝장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최종목표나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최종 목적지는 자유민주주의 기업모델인 듯하다. 자유시장주의 에서 그의 주장은 크게 환영받는 듯 했다. 하지만 글쓴이는 대니얼 벨이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예언했던 이야기를 인용해 후쿠야마의 이러한 주장은 자유주의적 자유기업 체제가 종말을 앞두고 있음을 암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의 자유주의적 자유기업체제는 현재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고 그 문제점이 최근 극도로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후쿠야마의 예언 역시 ‘자유주의적 자유기업 체제가 가장 지독한 위기를 앞둔 시점에서 터져 나온 것은 아닌가?’ 라며 반문한다. 그리고 역사의 종말에 대립되는 다음의 두 가지 문제를 이야기 한다.

자연의 종말

빌 매키번은 후쿠야마와 달리 우리시대가 목도한 것은 역사의 종말이 아닌 자연의 종말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유사 이래 인류는 대양과 대기를 거대한 쓰레기장 삼아 마음껏 사용하였고, 이는 자유주의적 자유기업체제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지구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무분별한 자연의 파괴는 지구상의 생명체의 파괴와 인류의 자멸을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역사의 종말이라는 후쿠야마의 생각처럼 현 체제가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되기는 힘들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자유기업의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 가치관과 윤리관이 바뀌어야 한다. 혹여 지금의 체제가 미래에도 지속된다 해도 그때의 사회는 지금과는 다른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추구하며 지금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며 적응했을 것이다.

세속윤리학의 시작

지난 수세기동안 인류는, 적어도 서구사회는 기독교 중심의 사회였다. 그 결과 윤리학연구는 대부분 종교적 틀 안에서 이루어져 왔으며 낙태와 동성애와 같은 종교적 문제로 도덕성을 판단해 왔다. 도덕원칙의 의미를 연구하고 윤리가 주관적인가 객관적인가를 논증하는 비종교 윤리학, 다시 말해 세속윤리학이 시작 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제는 종교를 넘어서, 그리고 오늘날의 지배적 정치, 경제 모델인 자유주의적 자유기업체제가 조장하는 물질적인 삶을 넘어선 가치와 삶의 태도를 고민해야 한다. 세속윤리학의 시작이란 우리의 가치와 삶의 대한 고민이 종교적 세습이나 물질주의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세계의 정의와 지속가능한 환경을 위한 고민으로의 변화하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세계의 빈곤, 평화, 인종주의 그리고 지구의 환경문제를 이 시대의 도덕적 문제로 주장하고, 이에 대한 근본원인을 해결한다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과는 다른 모습의 가치 있는 삶의 모습을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윤리학의 강조는 개인의 윤리관의 변화가 개인을 넘어선 정치와 사회에 대한 외면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정책적으로 사회적으로 문제해결이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현재의 자유시장주의 체제에서 개인의 윤리관의 변화는 문제해결을 위한 마지막 대안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피터싱어의 주장이다.

돈벌이에 관하여…

어떤 이는 자본주의 체제의 꽃은 주식이라고 한다. 주식은 내가 가진 돈을 투자하여 이자를 얻거나 주식가격의 차익에 의한 이익을 얻을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돈을 이용하여 부를 창출하는 것에 대해서, 서구사회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준 그리스의 철학자들의 생각과 근대 이전 기독교의 입장은 어떠할까?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인 플라톤과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유에 대한 다른 견해를 갖는다.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플라톤은 소유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이상적인 공동체에서 가장 낮은 계급인 농민과 수공업자만이 이익을 추구하며 재물을 축적할 수 있었고, 높은 계급의 통치자와 수호자들은 돈 때문에 부패할 수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는 공동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유의 즐거움을 인정하고 소유가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스승이 주장한 이상사회에서 적게 일하고 많이 받는 자들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유에 대해서 정당한 소유인 자애와 그렇지 않은 이기심을 구분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돈에 대한 지나친 욕망 역시 구분하였다. 그는 집안에 살림을 꾸미는 일 등의 자연스럽고 자애를 추구하는 일을 위해서 수단으로서의 돈벌이는 정당하지만, 돈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돈벌이에 대해서는 비난하였다. 또한 작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사육하는 등의 자연스러운 노동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맞지만, 사업으로 또는 물건을 사서 더 비싸게 되파는 것은 물건의 가치를 전혀 늘리지 않으며, 남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잘못된 행위라고 비난한다. 특히 고리대금은 이러한 잘못된 행위 중 가장 혐오스럽다고 비난하였다. 돈은 단지 거래수단일 뿐이며 자식을 낳을 수 없기에 돈을 번식시켜, 즉 이자를 받아 돈은 불리는 행위는 자연의 배치된다고 생각했다.

근대 이전의 기독교 사회 역시 이자를 통해 돈을 불리는 행위를 비난하였다. 고대 헤브라이 경전에서 민족의 생존을 위한 일부 이자 거래는 인정하기도 했지만, 이후의 기독교의 예수는 이자는 물론 돈 버는 행위 자체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초기의 기독교 공동체는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모든 소유를 공유하였다. 교부들의 가르침은 예수의 말씀과 상통하였고, 부자나 장사꾼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이후에도 장사꾼들에 대해서 인색했고 땅을 경작하고 먹고사는 사람들이 더 구원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고리대금에 대해서는 악행이며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비난하였다. 고리대금업자들은 땀 흘려 돈을 벌지 않는 도둑놈, 강도와 같은 취급을 받았고, 심지어 신의 말씀에 반하고 신의 영역인 시간을 돈으로 사고판다며 주장하였다.

이러한 고리대금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기독교와 경제적으로 결합하는데 수월하게 했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처럼 고리대금을 비난하고 소유의 한계에 대해서 진보적인 입장을 보여주었다. 그는 재산은 어떠한 목적에 부합할 정도만 소유할 수 있고, 그 이상의 재산에 대해서는 필요한 사람들의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심지어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서 남의 소유를 취하는 것은 훔치는 것이 아닌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자본주의가 서구사회를 점령하기 전까지 서구사회의 사유의 근간이 되어왔던 고대 그리스철학과 기독교의 입장은 돈에 대해서, 돈을 이용해 고리대금업을 하는 것에 대해서, 심지어 돈벌이를 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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